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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클리셰 TO DO LIST 15 : 후려치기의 묘수
자존감은, 대중심리학이 우리에게 가장 널리 가르친 심리용어가 아닐까요. 연애를 못해도 자존감이 낮아서, 연애를 시작하며 자존감을 채우려, 연애를 끝내며 자존감을 다쳤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라며, 자신을 사랑하면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다는 위로의 말도 흔하디 흔합니다. 그런데, K 드라마 속의 세계에서는 자존감 따위 나몰라라, 자기존중도 타인존중도 참으로 어렵기만 합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한국의 연애 드라마가 주인공의 자존감을 후려치는 양상들을 들여다볼게요.
글. 도람

<후려치기 베이직 : 셀프 후려치기>

가난하지만 억척 같은 주인공. 상처투성이지만 캔디처럼 밝은 주인공. 여린 속내를 감추고 강한 척하지만 뒤돌아서 눈물 짓는 주인공. 도무지 빠져나갈 곳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그녀를 구하는 건 오직 사랑뿐.
그녀는 잠 못 드는 밤 베갯잇에 얼굴을 묻으며 읊조리죠.
“내가 정말 해낼 수 있을까. 어디까지 버텨야 되는 걸까. 그 사람은 왜 날 이렇게 괴롭히지?”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치워도, 여자라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닥치고 맙니다. 그녀에게 찰나 행운이 다가왔다 싶어도, 납치되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고, 사기를 당해서 빈털터리가 되기도 하죠. 그녀는 어떻게든 탈출하고 싶지만, 자신 안에는 더 이상 답이 없습니다. 울고 몸부림치고 버둥거리다, 결국에는 자신을 후려칩니다. 난 안 될 거야.

장르가 로코라면 반드시 들어가는 장면. 세상과 자신의 불행을 줄줄이 나열하며, 내가 잘 될 리가 없어 한숨 짓습니다. 내가 잘 할 리가 없다 포기합니다. 과거의 상처를 모조리 꺼내서 새롭게 불행을 곱씹습니다. 그래야 남자주인공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난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 내 삶은 행복해질 여유가 없어요. 내 상처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해요. 내가 어떻게 그래요. 내 자존감은 바닥이고 당신의 사랑만이 날 구원할 수 있지만, 대놓고 요구할 순 없죠.
자신을 후려칠수록 사랑이 가까워지는 K드라마의 법칙은, 연애야말로 구원으로 가는 마법이라고 세뇌합니다.

<후려치기 플러스 : 카운터 후려치기>

“나 예뻐? 어때?” 라고 묻는 여자친구에게 K 드라마 속 남자친구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휴, 우리 못난이.” “니가 어디가 예뻐?” “넌 왜 갈수록 못생겨지냐.” “못 봐줄 정도는 아니야.”
속으로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심장이 두근대면서도 표현만큼은 반대로 해야 남자답나 봅니다. 예쁘다, 아름답다, 멋지다, 근사하다, 눈부시다, 황홀하다는 찬사들은, 미드에나 나오는 표현들입니다. 혹은 조연 남주의 몫이죠.
가뜩이나 자존감 낮은 그녀들에게 쏟아지는 후려치기는, 셀프 후려치기와 균형을 이루며 다시 한번 강력해집니다.

“별로야? 그렇게 이상해? 내가 보기엔 괜찮은 것 같은데…”
여자주인공들은 남자주인공과 알콩달콩 할수록, 미모와 재능과 매력을 평가절하 당하기 일쑤입니다. 남자들은 여자친구에게 반했다고 솔직할수록, 남성성을 상실하는 듯 느끼기 때문이죠. 오늘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우리의 여배우들은, K 드라마 월드에서 평범하고 못생긴 역할을 연기합니다. 누가 보아도 만발한 미모를, 본인은 모르는 양 할수록, 로맨스의 히로인이라는 증거입니다.

<후려치기 어드밴스드 : 에브리바디 후려치기>

남자주인공과 갈등에 빠졌나요. 이제는 이별이냐 재회냐 선택해야 하나요. 여자주인공은 친구들에게 털어놓습니다. 가족들이 드디어 알게 됩니다. 연애의 벽에 가로막혀 어찌해야 좋을 지 모를 때, 주변에서는 한결같이 말하죠.
“니가 잘못한 거야. 그만한 사람없어. 어서 가서 붙잡아.”
“그 사람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니가 이렇게 고집 세우면 정말 헤어질 지도 몰라.”
“예민하게 굴 것 없잖아. 너 때문에 지금 아파서 회사도 못 나왔대.”

진정한 사랑을 몰라보고 사소한 오해나 실수에 자존심을 세운 사람이 천하에 잘못한 사람이 되죠. 울면서 후회하고 쓰러져 절망한 사이, 결국 해피엔딩으로 달려가는 K드라마 로맨스는 이 정도면 감지덕지한 인연이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말하죠. 주변 사람들이 어찌어찌 두 사람을 연결하고, 눈물의 재회는 감동적인 주제가와 함께 합니다. 아무리 후려쳐도 사랑은 남네요. K드라마는 결코 이별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셀프 인정과 셀프 구원>

현실의 연애에서는 가장 먼저 피해야 할 연애상대가,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가치는 오직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누가 나를 후려친다면, 그 사람이 바로 내 인생에서 제거해야 할 사람이죠.

DO : 자신을 인정하고 스스로 구원하세요.

나의 좋은 점을 먼저 알아보고 말해주는 사람을 만나세요. 자주 자신을 돌아보고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들여다보고, 스스로 구하세요. 내가 즐겁고 행복할 때 연애상대를 고민하세요.

DON’T :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낮추지 마세요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떤지 평가해달라고 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평가를 전부인양 믿지 마세요. 자신이 가치없이 느껴질 때 진짜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삶의 구원이 바깥에 있을 거라 상상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사람만이 나를 구할 거라 착각하지 마세요.

자신의 가치를 정하는 건 오직 자신뿐이에요. 관계는 그 때 그 때 다르게 나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나를 살리는 관계는 계속 이어가고, 나를 죽이는 관계는 벗어나야 맞죠. 관계는 스스로 선택하는 사회적 약속인 걸요.
연애할 때는 서로 간의 거리가 가까워지기 쉽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말이 마치 진실인 듯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내가 나를 다 모르는데 상대라고 나를 다 알겠습니까. 어떤 말이 나를 속이고 어떤 말이 나를 후려치나요. 어떤 말이 나를 빛나게 하고 어떤 말이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드나요.
후려치기는, 연애의 주적입니다. 진심과 사랑만 전해도 모자란 시간이에요. 연애하며 자신을 더 잘 알게 되고 더 좋아하게 되고 더 편안하게 느껴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귀해지는 당신을, 러브 카운셀러가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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